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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츠 사변

[오소마츠상] 카라마츠 사변 16

진료비 수납을 마치고 1층의 홀을 지나는데, 돌연 음악 소리가 울렸다. 최근 TV를 틀면 자주 얼굴을 보는 아이돌의 신곡이었다.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리니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드는 카라마츠가 보였다. 저게, 카라마츠 벨소리였다고? 이젠 음원을 찾기도 어려운 오자키 음악만을 벨소리로 설정해 놨던 카라마츠의 휴대전화에서 저런 소리가 들리는 것이 생경해 멍한 표정을 짓는 이치마츠의 눈에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한 듯, 밝게 변하는 카라마츠의 얼굴이 들어왔다.

“카라마츠 형, 벨소리가….”

“아아, 얼마 전에 바꿨다.”

“언제?”

“며칠 전-, 아 우선 전화 좀 받도록 하지. 잠깐 앉겠다.”

그렇게 빠르게 말한 카라마츠는 의자에 앉으며 전화를 받았다. 마츠노 카라마츠입니다. 하고 전화를 받는 형의 목소리는 최근에 들었던 목소리 중 가장 밝고 쾌활했다. 마치 다치기 전의 카라마츠처럼. 쥬시마츠는 심장이 욱신거려 어깨를 움츠렸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일순 느껴진 거리감에 마음을 다친 듯, 가슴이 아파왔다.

이치마츠는 제 가슴을 꾹 누르며 땅바닥을 쳐다보는 동생의 손을 꽉 잡아줬다. 그를 향해 고개 돌린 쥬시마츠가 힘없이 웃는 것을 보며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세게 줬다.

“아, 별 이상은 없다. 순조롭다고.”

카라마츠는 전화 너머의 상대에게 방금 진료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듯 했다. 연신 환한 표정으로 상대가 눈앞에 있는 듯, 머리도 끄덕여가며 통화하는 카라마츠에게선 기분 좋은 기운이 풍겨 나왔다. 경쾌한 즐거움은 주변으로 번져가 카라마츠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얼굴엔 알게 모르게 작게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 안에서 웃지 못하는 것은 이치마츠와 쥬시마츠, 단 둘 뿐이었다.

“그래서 막 귀가하려던 참이다. …뭐? 지금?”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카라마츠의 얼굴이 돌연 곤혹스러움으로 살짝 찌푸려졌다. 말을 아끼며 옆에 앉아있던 이치마츠와 쥬시마츠의 얼굴을 힐끗 살펴본 카라마츠는 좀 전보다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좀…. 아니, 그건 아니고…. 일행이….”

입을 가리고 목소리를 낮췄지만, 이치마츠와 쥬시마츠가 워낙 지척에 있던 데다, 둘의 신경은 온통 카라마츠에게 쏠려있었기에 카라마츠의 작은 목소리는 하나도 빠짐없이 둘의 귀에 들렸다. 하나하나 상처를 받으면 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마음엔 계속 생채기가 생겨났다.

“…그래. …정말 괜찮은가?”

어렴풋이 들리는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자신들과 함께 와도 괜찮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에 카라마츠는 상대방에게 그래도 괜찮냐고 물었지만, 사실 카라마츠가 괜찮지 않은 것이었다. 힐끗힐끗 자신들을 보는 카라마츠의 눈빛에 담긴 또렷한 거리낌에 이치마츠는 입술을 즈려 물었다.

“…그래. 알겠다. …아는 곳이다. …응, 알았다.”

결국, 만나기로 하고 장소까지 잡은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곤 곧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살펴보던 카라마츠는 입을 꾹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어떤 말도 없이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병원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복잡한 마음으로 쳐다보던 둘은 끝끝내 카라마츠가 돌아보지 않고 혼자 묵묵히 걸어 나가자 울상을 지으며 허겁지겁 달려가 따라잡았다.

걷는 내내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환한 대낮에 오고가는 인파와 자동차에서 나는 소음으로 병원 주변은 시끌시끌했지만, 세 사람의 주변만은 세상과 단절된 듯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했다. 카라마츠는 병원 바로 앞의 택시 승강장을 지나쳐 버스 정류장을 향해 묵묵히 걸었다. 이치마츠와 쥬시마츠는 뭐라 말도 못붙이고 그저 카라마츠의 뒤만 쫓아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정류장에 도착한 후, 버스를 서너 대 보내고 나서야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라마츠였다.

“아까 통화 들었지?”

“…….”

이치마츠와 쥬시마츠는 너나할 것 없이 대답 없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딱히 카라마츠도 감추려고 했던 통화 내용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이 뭔가를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위축이 돼버린 둘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너희들끼리 먼저 들어”

“절대!”

카라마츠가 말을 맺기도 전에 이치마츠가 소리 지르듯, 언성을 높여 다급히 말을 잘랐다. 목소리를 높인 이치마츠 자신도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튀어나온 제 목소리에 놀란 듯, 잠시 입을 다물고 말을 멈췄다. 버스를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치마츠는 그 시선들을 최대한 무시하려했지만, 이목이 집중된 탓에 긴장으로 몸이 덜덜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어서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방해 안할게.”

노력을 했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그의 말꼬리는 볼썽사납게 떨렸다.

“이치마츠.”

하지만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온기 없는 카라마츠의 목소리는 타인의 시선 같은 건 인식할 틈도 없이 이치마츠를 채찍질했다. 이치마츠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필요하다면 오소마츠 형이나 쵸로마츠 형, 토도마츠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

“형이 원한다면 멀찌감치 떨어져있을게. 아니, 반드시 뒤떨어져 있을게.”

숨도 안 쉬고 말을 쏟아낸 이치마츠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부탁했다.

“그러니까…제발 같이 가게 해줘. 카라마츠 형.”

눈도 못 마주치고 쥬시마츠마냥 소맷자락을 길게 늘려 만지작거리면서 겨우겨우 말하는 이치마츠의 목소리는 여전히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끈질기게 부탁하는 말을 하며 이치마츠는 깨달았다. 자신은 카라마츠가 그어버린 선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 하고 있다는 것을. 과연, 내가 쥬시마츠를 도와서 카라마츠가 집을 떠날 수 있게 도울 수 있을까? 갑작스럽게 명확해진 마음에 이치마츠는 울상을 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카라마츠는 복잡한 얼굴로 이치마츠를 쳐다봤다. 카라마츠 입장에선 갑자기 자신을 위하는 척하는 형제들 중 가장 적응이 안 되는 것이 바로 이치마츠였다. 무슨 생각인지, 퇴원 후 쥬시마츠와 함께 그의 곁에서 떨어지려하지 않는 이치마츠는 요 며칠, 지금처럼 카라마츠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면이 종종 있었다. 쥬시마츠는 자신이 병원에서 부탁한 것이 있어서 그렇다지만, 이치마츠는 왜?

맷돌을 던질 정도로 그렇게나 자신을 싫어하면서 왜 갑자기 거리를 좁히려는 듯한 행동을 취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 쥬시마츠가 내 부탁 때문에 계속 곁에 있어서 그런 걸까. 둘은 제법 친하게 지내니까. 아니면 갑자기 친절한 척 구는 다른 형제들의 흐름 때문에? 그에 어울리지 않으면 뭔가 핀잔이라도 받을까봐?

뭐가 됐든, 썩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혼자 사랑하고, 혼자 믿었다, 혼자 상처받고. 이제 그런 건 싫다. 변덕스러운 일시적인 친절에 기뻐하고 다시 기대할 정도로 형제들을 향한 애정은 이미 카라마츠 안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번거롭기도 하고 혼자 움직이고 싶다는 것이 카라마츠의 솔직한 심정이긴 했지만 멀리서 약속 장소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더 이야기를 길게 끌고 싶지도 않고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이 정도로 머리 숙이며 같이 가고 싶다는 데 더 거절하는 것도 어렵고. 하여튼 괜한 트러블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몸이 다 나아 집을 나올 때까지는 적당히 형제들의 장단에 맞추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그래도…그렇게 마음을 먹었어도 이 동행이 썩 달갑지는 않았기에 카라마츠는 한숨을 쉬었다. 이치마츠는 형의 한숨소리에 물벼락 맞은 고양이마냥 이치마츠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카라마츠는 말없이 몸을 돌려 정류장에 들어선 버스를 향해 걸었다. 거절당했다고 생각한 이치마츠와 이치마츠의 등 뒤에 서서 형의 옷자락을 붙잡고 상황을 지켜보던 쥬시마츠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마음대로 해.”

몇 걸음 못가 들리는 목소리에 두 사람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비록 자신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도착한 버스에 무심히 올라타는 카라마츠였지만, 그래도 허락을 해줬다는 사실이 기뻐서 둘은 재빨리 그 뒤를 쫓아 버스에 올라탔다.

 

카라마츠가 향한 곳은 번화가의 어느 카페였다. 이치마츠가 말한 대로 따로 온 일행인양 다른 테이블에 자리 잡는 동생들을 특별히 저지하진 않으며 카라마츠는 누군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저쪽을 향해 걸어가는 카라마츠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이치마츠는 동생에게 물었다.

“뭐 먹을래, 쥬시마츠?”

“으응….”

먹겠다는 건지, 먹지 않겠다는 건지 모호한 대답을 하며 뚫어져라 카라마츠의 뒷모습만 쫓는 동생에 이치마츠는 더는 묻지 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쥬시마츠는 달콤한 디저트류를 좋아하니까 그에 맞춰서 적당히 골라야겠다고 생각하며 카운터로 걸어갔다.

발랄하게 인사하며 주문을 받는 점원에게 자신이 마실 핫초코와 쥬시마츠가 먹을 파르페를 주문했다. 더는 필요한 것이 없냐는 점원의 질문에 망설이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몫으로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예전이라면 무심하게 에스프레소를 주문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카라마츠의 것은 당연히 주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쓴 것은 싫어하는 카라마츠다. 온갖 폼을 잡으며 전문 용어를 들먹이며 어렵게 커피를 주문하곤 늘 절반도 마시지 못하고 남기던 것이 카라마츠다. 결국 오소마츠가 모르는 척하고 자신이 마시고 싶다며 물을 부어 옅은 농도의 아메리카노로 만들어 거기에 시럽을 섞은 후 나눠줘야 겨우겨우 마시는 것이 원래의 카라마츠다. 일부로 난감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어 에스프레소를 사주면 동생 앞이라고 허세를 부리며 고맙다고 말하는 카라마츠. 그런 즐거움과 장난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이다.

…카페라떼 정도라면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던 이치마츠는 자신이 한 주문을 하나하나 말하며 확인하는 점원에게 말했다.

“저기….”

“네, 손님.”

“카페라떼에 휘핑크림도 추가를….”

“휘핑크림 추가, 맞으신가요?”

“네.”

“주문 확인 하겠습니다.”

다시 이어지는 주문 확인 후, 계산을 마친 이치마츠는 진동벨을 건네받고 자리로 돌아왔다. 쥬시마츠는 한 치의 미동 없이 여전히 카라마츠가 앉아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6’라고 써져있는 진동벨을 만지작거리던 이치마츠도 쥬시마츠를 따라 슬그머니 카라마츠가 앉아있는 곳을 쳐다봤다. 자신들을 등지고 앉은 카라마츠의 등이 가장 먼저 보였고, 조금 시선을 트니 그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가 한 명 보였다.

자신들의 또래로 보이는 얼굴은 시종일관 밝은 얼굴로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치마츠와 쥬시마츠가 앉아있는 테이블은 입구에 가까운 곳이었고, 카라마츠와 카라마츠의 지인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매장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테이블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이치마츠로선 알 수 없었다. 얼핏 테이블 위에 종이들이 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가 종이 위를 짚으며 뭔가를 설명하고, 카라마츠는 드문드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펜을 들고 뭔가를 종이 위에 쓰기도 했다.

무슨 종이일까, 무슨 대화를 하는 걸까, 뭘 쓰고 있는 거지? 카라마츠도 저 녀석처럼 웃고 있는 걸까, 지금 카라마츠는 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거지?

미간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집중해서 그쪽을 보는 이치마츠의 귀에 쥬시마츠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연극, 내일, 1시, 허락, 입단….”

“…쥬시마츠?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가는 거야? 카라마츠 형아?”

“쥬시마츠?”

쥬시마츠의 상태가 이상했다.

“쥬시-”

재차 동생을 부르려는 차,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진동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잉, 지징 요란하게 울리는 그것을 집어 들고 저쪽을 쳐다보니 점원이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걱정스럽게 쥬시마츠를 쳐다보니 동생은 중얼거림을 멈추고 소매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6번 손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아, 네.”

이치마츠는 저를 부르는 음성에 힐끗힐끗 쥬시마츠를 쳐다보며 카운터로 향했다. 진동벨을 건네고, 트레이에 올라있는 음료를 들고 다시 테이블에 돌아와 앉았다.

“쥬시마츠, 이거 먹어.”

“…….”

“쥬시마츠.”

“이치마츠 형. 하시다를 집에 못 오게 하면 카라마츠 형이 집을 안 떠나지 않을까?”

“하시다? 카라마츠가 집을 떠나? 그게 무슨 소리야, 쥬시마츠.”

어딘지 귀에 낯익은 성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주제에 이치마츠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카라마츠가 집을 떠나는 것은 몸이 다 나은 뒤가 아니었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카라마츠는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고, 입단…은 확실한 건 아니고…. 입단을 해도 집을 안 나갈지도 모르고….”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이치마츠를 가만히 보던 쥬시마츠가 다시 카라마츠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치마츠 형. 카라마츠 형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어. 지금도, 내일도. 그걸 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야.”

“…!”

쥬시마츠의 말에 이치마츠의 가슴 한켠이 선뜩해졌다. 그 말대로였다. 선택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확실히 그들이 아니었다. 이치마츠는 떨리는 눈으로 저쪽 테이블의 남자를 찬찬히 살폈다.

장난기가 넘치고, 호남형의, 다시 봐도 낯익은 인상.

하시다, 하시다, 하시다…아.

깊게 묻어놨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녀석, 동창생, 하시다였다. 카라마츠와 제법 친하게 지냈던, 자신들과도 인사를 주고받았던 녀석이다. 분명히 연극부로 카라마츠와 주연 자리를 두고 경쟁하기도 했던 ‘직쏘’라는 특이한 별명을 갖고 있던 카라마츠의 라이벌이자 좋은 친구였던 녀석. 잊고 있던 기억이 점점 선명하게 살아났다.

그 녀석이 왜.

라고 생각한 찰나, 쥬시마츠의 중얼거림과 몰래 보았던 카라마츠의 휴대전화에 쌓여있던 문자들이 떠올랐다.

-연극, 사흘 뒤, 1시, 허락….

-얼른 나아. 어제 말했던 입단 건은 언제라도 OK! 선배님도 널 아직 기억하고 있더라.

낯익었던 수신인의 이름도 떠올랐다. 분명히 액정 속의 발신자의 이름은 분명 하시다였다.

모든 것이 연결된 순간, 이치마츠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멀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은 사실 코앞에 닥쳐있었다는 사실에 초조해진 심장이 욱신하고 쑤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쥔 이치마츠는 멍하니 저쪽 테이블을 쳐다봤다.

카라마츠와 대화하던 하시다는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이치마츠와 눈이 마주치고 휘둥그레 눈을 떴다. 그리고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이내 생각이 난 듯 카라마츠와 뭐라뭐라 이야기한다. 어떤 대화 내용인지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지만, 좀 전보다 더욱 왁자지껄해진 분위기만은 멀리서도 선명히 느껴졌다. 쥬시마츠는 좋은 청력 덕분에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돌연 카라마츠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쳐다봄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치마츠는 불시에 마주친 시선에 흠칫하는 데, 쥬시마츠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테이블 아래로 밀어 넣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이리 오라는 듯 손을 까닥거렸고 이치마츠는 쥬시마츠와 함께 엉거주춤 그곳으로 향했다.

“에, 그러니까”

싱글싱글 웃으며 하시다가 둘을 쳐다보자 카라마츠가 제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이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보라색은 이치마츠, 노란색은 쥬시마츠.”

“아, 맞아, 맞아. 이름 들으니까 기억난다! 혹시 나 기억해? 나 종종 집에도 놀러갔었는데.”

선명하게 기억한다. 문화제 준비한다고 늦게까지 학교에 붙어있다 막차를 놓쳤다고 넉살좋게 잠도 자고 갔던 것까지, 지금은 거의 모든 것을 떠올린 참이었기에 이치마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쥬시마츠는 그 이름을 불렀다.

“하시다.”

“응, 맞아. 기억하는 구나. 나도 너희들 기억해. 오랜만이라 사실 그때처럼 완벽하게 얼굴은 구분을 잘 못하겠지만, 하핫. 반가워!”

“응….”

이치마츠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짓는다고 어설프게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이 느껴졌다.

“카라마츠, 왜 같이 왔으면서 따로 떨어져있었어? 모르는 사이도 아니구만! 일행이 같이 온다고 했는데 혼자 와서 앉기에 결국 혼자 왔나 했잖아. 자, 자. 그만 서 있고 음료 시킨 것 있으면 가져와서 합석하자!”

그 권유에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눈치부터 살폈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어떤 반응도 없이 새까만 커피가 담긴 작은 잔을 들고 창밖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치마츠가 망설이는 사이, 잽싸게 트레이를 챙겨온 쥬시마츠 덕에 이치마츠는 하시다의 옆에,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옆에 앉게 되었다. 자리에 앉은 쥬시마츠는 카라마츠 앞에는 카페라떼를, 제 앞에는 파르페를, 이치마츠의 앞에는 핫쵸코를 빠르게 놓고 트레이를 한쪽으로 치웠다. 그 재빠른 행동에 너털웃음을 터뜨린 하시다는 제 앞에 놓인 과일 음료를 쪽쪽 빨아 마시곤 말했다.

“아, 그런데 미안해. 아까도 말했지만 얼굴 못 본 기간이 길어서 그런 가 옷 색깔 아니면 얼굴이 좀 헷갈리네.”

“상관없어.”

이치마츠는 티스푼으로 의미 없이 핫초코를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음, 여전하구나, 이치마츠. 이렇게 계속 보니 하나, 둘 뭔가 기억이 나는 것도 같네. 하핫, 그래도 앞으로 자주 보면 금방 눈에 익어서 구분해낼 거야! 그 때까지만 이해해줘.”

“자주 봐?”

핫초커를 휘휘 젓던 이치마츠의 손이 뚝 멈췄다.

“응? 아, 카라마츠. 말 안했어?”

“아아, 안했지.”

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놓으며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헤, 그럼 내가 말해도 괜찮은 거야?”

“상관없어.”

“뭐, 본인이 그렇다면.”

어깨를 으쓱한 하시다가 다시 이치마츠와 쥬시마츠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카라마츠, 우리 극단에서 스카우트하기로 확정했거든.”

아, 역시 그 문자….

“극단 운영하는 분이 우리 고등학교 출신인 대선배님이기도 하시고, 마지막 문화제 때 카라마츠가 연기했던 햄릿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더라고. 그 외에도 다들 카라마츠는 알고 있고. 카라마츠의 입단은 단원들 모두 찬성이라서 낙하산 소리 들을 염려도 없다고.”

“…그런데 너무 갑작스러운데.”

이치마츠의 말에 하시다도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그래. 다들 카라마츠가 다친 건 알고 있어서 붕대까지 다 풀고 회복한 후에 와도 된다고 했는데, 이 녀석이 한시라도 감을 되찾고 싶다고 출퇴근이라도 하겠다고 해서 내가 좀 수고해주기로 했지.”

이치마츠의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이 녀석은 극구 사절했지만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지금까지 진 ‘빚’도 있고, 이 기회에 좀 갚아야지. 그래서 3일 후부터 매일매일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내가 오후에 데리러 갈 거야. 집 앞으로. 극단에서도 오후에 서너시간 정도라면 괜찮다고 허락도 했고.”

“…극단은 어디…?”

“아, 여기 카페에서 가까워. 저쪽 모퉁이”

“하시다. 너 전화 왔다.”

위치를 설명하려는 하시다의 목소리를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가로 막았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테이블에 올려져있던 하시다의 휴대전화가 소리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액정을 살핀 하시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재빠르게 말했다.

“이크, 선배님이네. 왜 안돌아 오냐고 전화했나보다. 잠시만. 네, 선배! …네, 만났어요!”

갑작스럽게 단절된 대화에 테이블엔 기묘한 적막감이 흘렀다. 하시다의 요란스러운 목소리가 테이블을 떠다녔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쳐다봤다. 합석한 이후로 지금까지 창밖만 보던 것과는 다르게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정확히 쳐다보고 있었다. 전화가 울린 것은 우연이겠지만 그것을 놓치지 않고 써먹은 카라마츠의 눈이 이치마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이상 알 것 없다고.

이치마츠는 제 앞에 놓인 컵을 들어 일그러지려는 입가를 가렸다. 달콤해야할 핫초코는 차게 식었고, 아무 맛도 나지 않고 입을 쓰게 만들었다.

“미안, 이제 들어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러게 이건 그냥 사흘 후에 보여주면 된다니까.”

“오랜만에 나도 땡땡이 치고 싶어서 그랬다, 왜!”

장난스럽게 말한 하시다는 호탕하게 웃으며 이내 농담이었다고 덧붙이며 말했다.

“카라마츠, 너 다치고 바로 극이 상영되는 통에 문병도 못 갔잖아. 상태가 어떤 가 얼른 보고 싶었어. 다른 단원들도 은근히 네 안부 걱정하던 눈치고. 그리고, 인마. 내가 오늘 병원까지 가려고 했는데 못 가게 말린 건 너였잖아. 카라마츠 네가 못 가게 했으니, 네가 와야지.”

이상한 논리를 펼치는 친구를 보며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하여튼 내가 바래다줄까?”

“됐다. 전화, 사보 선배지? 지금 돌아가야 그나마 덜 혼날 텐데.”

“한 대 맞으나, 두 대 맞으나.”

“그래서 두 대 맞게?”

“아니.”

픽 웃은 하시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만 온 거면 그렇게 하겠지만 네 형제들도 왔으니 걱정할 건 없겠네. 조심해서 들어가고, 나 먼저 자리 비울게. 너흰 더 천천히 있다가 가. 음료도 다들 잔뜩 남았네.”

“알았으니까 얼른 가.”

“왜 이렇게 나를 못 보내서 안달이야. 이치마츠, 쥬시마츠. 그럼 카라마츠 잘 부탁해! 3일 후에 보자!”

시끄러운 녀석이 사라지고, 테이블 위엔 적막만 남았다. 누구에게 누굴 부탁한다는 건지. 하시다가 생각 없이 남긴 인사말은 사정 모르고 건네진 평범한 내용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어이없는, 누군가에겐 부담스러운, 누군가에겐 화를 유발하는 말이었다.

입이 계속 말라 맛도 안 느껴지는 핫초코를 연신 들이키던 이치마츠는 드드드, 하고 테이블이 떨리는 소리에 진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라마츠가 진동이 울리는 휴대전화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언제 벨에서 진동으로 바꾼 건지 모르겠지만, 요란하게 진동음을 내며 환하게 반짝이는 화면에 떠있는 이름은 ‘오소마츠’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보던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와 쥬시마츠가 보고 있음에도 무심히 붉은 색의 거절버튼을 눌렀다. 끊어진 이후에도 두 번, 더 울리던 오소마츠의 전화를 연달아 받지 않던 카라마츠는 문자가 왔음을 알리는 짧게 울리는 진동에 미간을 찌푸리며 화면을 조작했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다르게 미소 지으며 화면을 보기 시작했다. 쥬시마츠가 힐끗, 살피니 발신인은 방금 헤어졌던 ‘하시다’였다.

쥬시마츠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시답잖은 농담으로 가득찬 문자를 소중하다는 듯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카라마츠의 눈치를 살피던 쥬시마츠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카라마츠 형아.”

“…왜.”

“하시다랑 졸업하고도 연락했었어?”

“그렇다만.”

“그, 하시다가 아까 말했던 ‘빚’은 뭐야?”

“특별한 건 없다. 그냥 저 녀석 혼자서 빚이라고 생각한 것뿐이니까.”

딱 잘라 말하는 어조에 용기를 잃은 쥬시마츠는 고개를 숙이며 그렇구나, 하고 혼잣말하듯 웅얼거렸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이치마츠는 머뭇거림을 지우고 쥬시마츠를 대신해 물었다.

“저기, 알려주면 좋겠는데….”

휴대전화로 향해있던 카라마츠의 시선이 이치마츠를 향했다.

“…왜 그게 알고 싶지?”

“그건….”

“이치마츠, 너무 새삼스럽게 구는 군.”

“…….”

이치마츠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목이 콱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는 다시 진동이 오는 휴대전화를 쳐다보며 여상히 말했다.

“…나도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이나 선후배는 몇 있다. 이사할 때, 손이 부족하다고 하면 도와주거나, 아르바이트를 돕는다거나, 친구사이에 할 수 있는 사소한 부탁들을 들어준 게 전부다.”

아마도 하시다가 말하는 빚은 극단 초반에 인력이 부족할 때 자주 나가서 도와줬던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카라마츠는 그것까진 말하지 않았다.

“…그래.”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후 수차례, 카라마츠의 휴대전화 진동이 울리고, 더는 그것이 울리지 않게 되고 나서야 카라마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지.”

“응, 카라마츠 형아.”

“…둘은 먼저 가고 있어. 난 정리하고 갈게.”

“얼른 와, 이치마츠 형아.”

“응, 둘이 가고 있어.”

이치마츠는 자리를 뜨는 두 사람을 보다 테이블을 쳐다봤다. 테이블 위에는 다섯 개의 잔이 있었다. 하시다, 쥬시마츠, 자신, 그리고 카라마츠 몫의 잔은 2개. 이치마츠는 그 다섯 개의 잔을 치우기 위해 손을 뻗다 깨달았다. 카라마츠가 싫어하는 쓰디쓴 에스프레소가 담겼던 잔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비어있었는데, 자신이 가져왔던 카라마츠 몫의 카페라떼는 조금도 줄어있지 않다. 숨이 죽어버린 휘핑크림이 빨대와 카페라떼 위에 엉켜 지저분하게 둥둥 떠 있었다.

그런데 하시다가 가져왔던 에스프레소는 말끔하게 비워져있었다.

…아아.

이치마츠는 멍하니 두 개의 잔을 바라봤다. 카라마츠가 멀어진다. 그리고 종국엔 떠나갈 것이다. 그것을 위한 시간이 드디어 가시적으로 쌓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확실한 증거에 이치마츠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싫어, 카라마츠. 갈색의 원목 테이블 위로 점점이 검은 얼룩이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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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타, 비문이 있을 겁니다. 발견하시면 부담없이 댓글로 알려주세요!(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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