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라마츠 사변

[오소마츠상] 카라마츠 사변 18

 평일의, 아침 7시 30분이라는 시간. 보통의 가정에선 한참 아침을 먹거나, 각자의 일과를 위해 집을 나설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턴 니트가 돼버린 여섯 쌍둥이들에게 있어서는 한밤중과도 같은 시간이었었다. 하지만 카라마츠가 다리의 깁스를 푼 이후론 7시 30분은 마치 학창시절 때와 같은 식사 시간이 되었다. 왁자지껄했던 그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모두가 둘러앉은 거실의 식탁 위는 식기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뉴스를 틀어놓은 채널에서는 기상 캐스터가 경쾌한 어조로 오늘의 날씨를 알려주고 있었다. 캐스터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라마츠는 앞에 놓인 밥을 한 젓가락 입에 넣고, 뒤이어 생선 토막을 적당히 쪼개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슬쩍슬쩍 저를 향하는 형제들의 시선은 모른다는 듯 오로지 제 앞의 음식만 주시하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쥬시마츠는 밥 먹는 카라마츠의 옆얼굴을 보며 반찬엔 젓가락도 못 대고 오로지 왼손에 들고 있는 밥그릇의 밥만 입에 우겨넣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던 쵸로마츠가 하나, 둘 바닥으로 흩어져 떨어지는 밥풀을 보고 “쥬시마츠, 밥 흘리고 있잖아.”라고 주의를 주면 잠깐 손이 멈추지만 그래도 결국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뿐이었다.

쵸로마츠는 한숨을 쉬며 쥬시마츠의 밥그릇 안으로 쥬시마츠 몫의 생선살을 넣어줬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쥬시마츠의 시선은 오로지 카라마츠에게 향해있었다.

이치마츠는 제대로 앞에 놓인 음식을 보고 있지만 그의 젓가락은 육안으로도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적은 개수의 밥알 몇 개를 집어 습관적으로 입에 넣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는 그저 배경음악일 뿐이었다. 이치마츠의 귀는 온통 카라마츠의 젓가락 소리를 쫓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그런 이치마츠에게 “제대로 좀 먹어. 반찬도 좀 먹고. 요즘 매일 밥 반도 못 먹고 있잖아?”라고 참견을 해왔다. 쵸로마츠의 목소리에 젓가락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이치마츠는 그제야 우엉조림을 하나 집어 입에 넣고 한참을 우물거렸다. 씹어서, 삼켜야하는 데 카라마츠의 소리에 신경이 집중되어서 이치마츠의 입은 계속 맛이 다 빠진 우엉만 우물거리고 있었다.

토도마츠의 젓가락질은 힘이 없었다. 제대로 밥과 반찬을 골고루 먹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먹다말고 종종 움직임을 멈췄다. 카라마츠의 젓가락이 그릇에 잘못 스쳐 소리를 낸다던지, 젓가락을 놓고 국을 마시기 위해 다른 손을 움직인다던지, 카라마츠의 움직임이 변화할 때마다 흠칫거리며 손을 멈추기 일쑤였다.

오소마츠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새집처럼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잠옷,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아침잠에 취해 반쯤 감긴 눈. 영락없는 평소의 오소마츠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주변 상황에 아랑곳없이 제 몫의 음식을 확실히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는 먹성도 좋아 제 몫의 반찬이 남아있으면서도 은근슬쩍 쥬시마츠나 이치마츠의 반찬에 눈독을 들였다. 본능을 쫓아 밥상을 가로지르는 그의 젓가락에 결국 쵸로마츠에게 한소리를 들으면 그제야 투덜거리며 젓가락을 뒤로 물린다. 그에게 잔소리를 하는 쵸로마츠의 표정이 미세하게 편안해졌다.

“잘 먹었습니다.”

결국 안정적으로 제 몫의 식사를 마친 카라마츠가 오늘도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자식을 먹으며 위장이 조금 줄어들었는지 오늘도 그의 접시엔 반찬이 조금 남아있었다. 오소마츠는 그것을 힐끗 보면서도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라마츠의 뒤를 따라 식기를 엉성하게 쌓아들고 일어나는 쥬시마츠의 반찬접시를 아슬아슬하게 낚아챘다. 그 기습적인 행동에 쥬시마츠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것을 전부 놓쳐 대형 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하지만 그는 오소마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반찬 접시를 제외한 다른 식기들을 챙겨 들고 부랴부랴 카라마츠의 뒤를 쫓았다.

부엌에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저녁도 준비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목소리에 이치마츠는 어깨를 더 움츠렸다. 깨작거리던 젓가락질도 멈췄다. 입맛이 완전히 사라졌다. 더 먹으면 얹힐 것 같아 이치마츠는 슬쩍 엉덩이를 뒤로 뺐다.

“이치마츠, 안 먹어?”

“…어.”

이치마츠의 긍정에 쥬시마츠의 조림을 한입에 먹어치운 오소마츠가 눈치 없이 거의 그대로 남은 이치마츠의 반찬에도 욕심 부리며 젓가락을 들이밀었다. 그런 형에게 결국 쵸로마츠는 다시 잔소리를 시작했다.

“어이, 오소마츠 형! 방금 쥬시마츠 것도 먹었으면서 이치마츠 것도 탐내는 거야?”

“안 먹는다니까 괜찮지 않아?”

“안 괜찮다고! 이치마츠! 제대로 좀 먹어. 너, 어제 저녁도 안 먹었잖아?”

오소마츠의 손에 들린 반찬접시를 빼앗기 위해 식탁을 가로질러 손을 쭉 뻗었다. 오소마츠는 그에 약 올리듯 이리저리 접시를 움직이며 쵸로마츠의 손을 피했다. 그 소란에 토도마츠가 항의하는 대신 입에 젓가락을 물고 밥 먹는 것을 멈추는 것을 본 이치마츠가 급히 둘에게 말했다.

“쵸로마츠 형, 나 배 안고파. 괜찮으니까, 오소마츠 형. 다 먹어도 돼.”

“럭키!”

쵸로마츠는 반찬의 주인이 괜찮다는 말에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자리에 앉으며 오소마츠에게 퉁박을 놓았다.

“넌 돼지냐!”

“네, 돼지입니다~.”

두 형들의 아옹거림으로 여전히 떠들썩하기는 했지만 조금 전보다 훨씬 차분해진 분위기에 멈춰있던 토도마츠의 젓가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이치마츠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의 신경은 다시 거실 밖으로 쏠렸다. 부모님과의 대화를 끝낸 듯,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욕실로 걸어가는 발소리 둘이 들려왔다. 두 종류의 발소리 중 약간 고르지 못한 소리를 내는 하나가 유독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보지 않고 있음에도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절룩거리는 뒷모습에 손에 잡혔던 가느다란 발목이 생각났다. 어쩐지 토기가 올라왔다. 울렁거리는 속을 침을 삼켜 누르며 이치마츠는 밥그릇과 국그릇만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이어 토도마츠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소리하느라 손이 자주 멈췄던 쵸로마츠는 다들 일어나는 모습에 뒤늦게 급히 식은 음식을 먹었다. 오소마츠는 그런 동생을 보며 느긋하게 남은 반찬들을 독식하고는 기세 좋게 웃었다.



부모님은 10여분 전에 먼저 출근을 마쳤고, 그보다는 조금 늦게 준비를 마친 카라마츠가 현관에 섰다. 쥬시마츠도 재빠르게 달려와 그 옆에 섰다. 어쩐지 신발이 보이지 않아 신발장을 뒤적이며 카라마츠가 말했다.

“쥬시마츠, 오늘부터는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다만.”

“-하시다가 오늘 소품 들어온다고 도와달라고 했어! 아르바이트!”

“그런가.”

쥬시마츠의 말에 카라마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하고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신발장에도 신발이 없었다. 이상했다. 어제도 분명히 신었던 신발인데.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현관을 둘러보던 카라마츠의 눈에 문득 우산꽂이 뒤쪽이 보였다. 어린애의 장난처럼 뒤쪽으로 교묘하게 감춰진 자신의 신발을 발견한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신발을 가져오기 위해 양말바람으로 현관에 내려서려는 카라마츠의 앞을 쥬시마츠가 막아섰다. 멈칫하는 형을 뒤로하고 그는 잽싸게 현관으로 내려가 카라마츠의 신발을 들어 그 앞에 내려놨다. 눈이 마주치자 그냥 싱긋 웃어올 뿐, 쥬시마츠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카라마츠는 먼지투성이의 현관 바닥에 닿고 있는 쥬시마츠의 하얀 양말을 빤히 쳐다봤다. 왜 네가 그걸 가져오지? 라고 물으려 했으나, 더럽혀진 양말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쥬시마츠의 행동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가슴을 뭔가가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카라마츠는 얹힌듯 더부룩한 명치 부근을 꾹 누르며 쥬시마츠에게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곤 천천히 신발을 신었다. 카라마츠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고맙다는 말을 들은 쥬시마츠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카라마츠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쑥스럽게 웃던 쥬시마츠는 빠르게 저를 스쳐지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카라마츠의 뒷모습을 보곤 급히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오늘은 짐을 옮겨야하니 슬리퍼는 신으면 안됐다. 대충 발을 비벼 운동화 안에 밀어넣으며 후다닥 문밖으로 나간 그는 집 안을 향해 “다녀오겠슴-머슬!” 하고 근래 들어 가장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곤 현관문을 닫았다.



거실에 널브러져 그릇도 치우지 않고 TV를 보던 오소마츠는 복도에 메아리치던 동생의 목소리가 지워질 무렵 엉덩이를 북북 긁더니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카라마츠랑 쥬시마츠 벌써 나갔-, 엑? 오소마츠 형? 아직도 안치우고 뭐하고 있는 거야?”

이를 닦고 거실로 돌아온 쵸로마츠가 아직도 엉망인 탁자 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소마츠는 쵸로마츠 옆으로 걸어가 엉덩이를 긁던 손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응, 응. 쵸로마츠. 뒷정리 부탁해~!”

“뭐, 뭐?! 내가 왜 형이 먹은 걸 치워야해! 얼른 치워!”

“형아가 지금 조금 바빠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무슨 헛소리야!”

“응, 응. 그럼 쵸로쨩, 부탁해~.”

“누가 쵸로쨩이냐! 안 돌아와?! 인마!”

오소마츠는 쵸로마츠의 원성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어슬렁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자신의 외침에도 꿈쩍 않는 뒷모습을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보던 쵸로마츠는 한숨을 쉬며 탁자를 쳐다봤다. 동생들이 남긴 탓에 잔뜩 남아있던 반찬들이 있던 접시가 말끔히 비어있었다. 텅텅 빈 접시들을 보니 어쩐지 질리기까지 했다. 오소마츠가 먹은 양은 최소 3인분이다.

어쩌면 4인분이라고 쳐도 될지도.

쵸로마츠가 조금 남긴 조림까지 완벽하게 사라져있었다. 진짜로 다 먹은 거냐. 아침부터 이런 텐션이 가능해?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위장이야? 라고 입으론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성실하게 탁자를 정리를 시작했다.

“이치마츠, 안 도와줄 거면 잠옷이라도 갈아입고 오는 게 어때?”

“…귀찮아….”

한 박자 늦게 답이 들려왔다. 한쪽은 너무 텐션이 높고, 한쪽은 너무 텐션이 낮고. 둘을 적당히 섞어서 쪼개놓고 싶다고 생각하며 쵸로마츠는 동생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저기, 이치마츠. 고양이 밥 주러 안 가?”

쵸로마츠의 말에 느릿느릿 눈을 끔뻑이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이치마츠는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이따.”

“아침 밥 시간 되지 않았어?”

끈질기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이치마츠는 대답 없이 세우고 있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더는 대화하기 귀찮다는 기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쵸로마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불성실한 태도에 대해 지적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려는 차였다.

“저기, 혹시 카라마츠 형, 나갔어?”

뒤에서 쭈뼛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응, 방금 나간 것 같아. 닦고 오니까 안보이네.”

“…그래.”

빈 그릇들을 들고 몸을 돌리니 거실 문을 꼭 잡고 현관문을 쳐다보는 토도마츠가 보였다. 평상복으로 말끔하게 갈아입고, 비니까지 눌러쓰고 작은 손가방까지 들고 있는 모습은 외출준비를 마친 것과 같아서 그를 스쳐 지나며 쵸로마츠가 물었다.

“어디 가게?”

“…아니.”

“응? 어디 가려고 가방이랑 모자 챙긴 거 아니야?”

“응…, 아니. 아니야.”

하염없이 현관문을 보던 토도마츠는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거실로 들어왔다.

“토도마츠. 나갈 거 아니면 거기 마무리 좀 해줘. 난 설거지할게.”

“아, 응.”

쵸로마츠의 목소리에 선뜻 대답한 토도마츠는 문가에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치우다만 탁자로 다가왔다. 오소마츠 몫의 접시들과 젓가락이 보였다. 부엌에 있던 쵸로마츠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 아침마다 자신이 설거지를 한다는 둥, 다들 조금 너무한 거 아니냐는 둥의 가벼운 투덜거림이었다. 그 목소리에 미안하다고 대답하며 토도마츠는 접시들을 챙겨들었다. 막 거실 입구를 지나던 차였다.

“조심-”

동생을 주시하고 있던 이치마츠가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며 다급히 입을 열었지만 늦었다.

“앗!”

문가에 뒀던 가방끈이 발에 걸려 토도마츠는 크게 휘청거렸다. 다행이 균형을 잡아 넘어지진 않았지만, 젓가락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설거지를 하던 쵸로마츠가 흠칫 놀라 토도마츠를 쳐다봤다. 조금 창백한 안색에 수도를 잠그고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아, 응. 미안. 젓가락, 떨어뜨렸어.”

쵸로마츠는 문가를 힐끗 봤다. 방금 발이 걸린 탓인지 가방이 열려 내용물들이 어수선하게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거기다 젓가락이 떨어지며 물기도 바닥에 좀 튄 것도 보였다. 쵸로마츠는 토도마츠의 손에서 접시들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안 다쳤으니 다행이야. 바닥 좀 닦아줄래?”

실수에 대한 잔소리 대신 할 일을 짚어줬다. 잔소리를 하기엔 동생의 얼굴이 너무 딱해보였기 때문이다. 토도마츠는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걸레가 어디 있더라.

“됐어. 토도마츠. 넌…가방 정리해.”

“이치마츠 형?”

아냐, 내가 할 게. 라고 말해봤지만, 이치마츠는 묵묵히 동생을 거실 안으로 밀어놓고 주방 구석에 놓인 걸레를 들고 복도를 닦기 시작했다. 그것을 멍하니 보던 토도마츠는 바닥을 보며 거실로 돌아왔다.

이치마츠가 말한 대로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별 내용은 없었다. 바닥에 쏟아진 지갑과 동전들, 손수건, 작은 수첩, 휴대전화가 고작이었다.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겨 넣고 구석에 놓인 의자에 가방을 던지듯 올려놓고 휴대전화만 챙겨 탁자에 가 앉았다.

그새 바닥을 다 닦은 이치마츠도 느릿느릿 거실로 돌아와 전용자리와 같은 구석으로 걸어가 다시 무릎을 세워 앉았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둘 사이에 딱히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TV 광고만 시끄럽게 공간을 가득 채웠다. 설거지를 마친 쵸로마츠가 거실로 들어왔다. 탁자에 앉아 TV 채널을 이리저리 조작하던 그는 별 거 없는 내용들에 TV를 꺼버렸다. 그리고 즐겨보는 구인 잡지를 펼쳐들었다. 어제도 봤던 내용들이지만 놓친 것이 있을까 싶어 다시 찬찬히 살피던 그는 탁자에 진동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토도마츠로부터의 진동이었다.

“토도마츠, 다리 조금 진정하면 안 될까?”

“에.”

“다리. 떨고 있잖아.”

“아, 미안.”

지적을 하니 떨림이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토도마츠는 계속 다리를 떨었고, 쵸로마츠는 계속 지적을 했다. 지적할 때만 멈추고, 다시 다리를 떠는 통에 살짝 언성을 높이니 그제야 완전히 조용해졌다.

 쵸로마츠는 다시 집중해서 구인 잡지를 살폈다. 어제 보지 못했던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곳이 눈에 보였다. 이력서나 내볼까 싶어 작성하는데, 기습처럼 탁자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종이 하나를 버리게 됐다.

“토도마츠.”

짜증이 섞여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어깨를 크게 떤 토도마츠가 허둥지둥 다리에 바짝 힘을 주며 고개를 숙였다.

“읏. 미, 미안. 아, 왜 자꾸 이러지?”

“하아.

쵸로마츠가 한숨을 쉬는 소리에 토도마츠의 어깨가 재차 위로 튀었다. 구석에 앉아 그때까지도 조용히 있던 이치마츠가 입을 열었다.

“토도마츠.”

어두운 안색의 토도마츠가 그를 돌아본다. 혼란이 가득한 동생의 얼굴에 작게 한숨을 쉰 이치마츠는 몸을 좀 더 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이리오라고 말하는 것 같은 행동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던 토도마츠는 핸드폰을 꼭 쥐고 그 옆으로 무릎걸음으로 걸어왔다. 벌을 서듯 무릎을 꿇고 어정쩡하게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토도마츠를 흘낏 본 이치마츠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동생의 손을 움켜잡았다. 제 손길에 재차 흠칫, 놀라는 걸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옆에 똑바로 앉아. …뭐, 쓰레기 옆이라 앉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 말에 재차 몸을 떤 토도마츠는 엉거주춤 그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치마츠와 똑같이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얹었다. 하지만 좀 전과는 달리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토도마츠는 두근거리던 심장이 서서히 진정되는 것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더는 다리를 떨지 않기에 이치마츠는 동생의 머리 위로 툭하고 손을 올렸다. 움찔하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칭찬하듯 툭툭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상냥한 손길에 토도마츠는 고개를 숙였다. 코가 찡해지고 눈가가 갑자기 시큰해져서 슬쩍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동생의 바지에 검은 얼룩이 번지는 걸 이치마츠는 모르는 척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구석은 환한 아침임에도 어둠컴컴하게 느껴졌다. 토도마츠가 작게 훌쩍이는 걸 들은 쵸로마츠는 괜히 자기가 울린 것 같아 난처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 아니, 난 그냥 다리 떨면서 탁자도 같이 떨리니까 이력서 쓰기 힘들어서 말한 것뿐인데.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도 않았잖아? 곤란하네. 라고 생각하는 차였다. 복도를 지나가는 붉은 후드티를 입은 장남을 발견했다.

“오소마츠 형, 어디가?”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기에 쵸로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복도로 나갔다. 오소마츠는 “응, 외출!”이라고 가볍게 말하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오늘도 나가? 요즘 아침마다 나가네?”

복도에 걸터앉아 운동화를 챙겨 신는 오소마츠의 옆에 서며 쵸로마츠는 가볍게 물었다.

“아, 그랬던가?”

“그걸 되묻냐….”

가벼운 물음에 가벼운 대답이 돌아왔다.

“설마해서 묻는데, 파칭코?”

“응, 어떠려나.”

“뭐야, 그러면 경마?”

“경마는 이따 오후!”

헐거운 운동화 끈을 단단히 다시 매며 오소마츠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이게 자랑스러워할만한 일정이냐, 싶어 쵸로마츠는 혀를 찼다.

“역시나 가는 구만! 형도 일 좀 알아보는 게 어때!”

“응, 응. 언제나 마음으로 알아보고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 발끝으로 탁탁 땅을 굴러보곤, 만족스럽게 웃으며 오소마츠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태도에 쵸로마츠가 한소리를 하려하는 차.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약삭빠르게도 오소마츠는 재빨리 현관을 나섰다. 쵸로마츠는 문 밖에서 아른 거리는 그림자를 향해 닫힌 문에 대고 “사람이 말하는 데 도망가냐! 오소마츠!”라고 외쳤다. 작게 웃는 소리와 빠르게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한숨을 쉬던 그는 문득 오후에 경마라면, 그럼 오전인 지금은 어딜 가는 건지 듣질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딱히 오소마츠의 일정이 진짜로 궁금해서 물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듣지 못한 대답은 그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워졌다. 쵸로마츠가 원했던 것은 적당히 자연스럽게 거실을 빠져나올 구실이었으니까, 그 목적은 달성된 터였다. 쵸로마츠는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발소리를 죽이고 거실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감당하기 싫은 무거운 공기는 정말 부담스러웠다.



오소마츠는 고개 숙이고 바닥을 보며 걸었다. 그러다 작은 돌멩이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무료했던 그는 돌멩이를 툭 찼다. 저 앞으로 데구르르 굴러간 돌멩이를 향해 걸어간 오소마츠는 다시 그것을 발끝으로 툭 찼다. 차고, 굴러가면, 그걸 쫓아가고, 다시 차고, 굴러가는 걸 확인하고 다시 쫓아가고. 어릴 때 자주 했던 돌멩이 축구가 생각났다. 어린 시절의 놀이들이 거의 그렇듯 별 의미는 없던 놀이였다. 흰 선만 밟아서 집에 도착하기, 그림자만 밟기와 같은 맥락의 매일 지루한 등하교 길의 시답잖은 그런 놀이.

돌멩이가 툭, 툭 발끝에 닿는 느낌이 얇은 캔버스화 너머로 느껴졌다. 계속하다 보니 어릴 때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오소마츠는 저도 모르게 열중했다. 오랜만에 하는 놀이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는지 잠시 후엔 제법 능숙하게 돌멩이를 원하는 곳까지 굴릴 수 있게 되었다.

차다보니 어쩐지 신이 나서 자신만만하게 차다 힘을 너무 과하게 줬는지, 잘 굴러가던 돌멩이가 경로를 이탈했다. 때맞춰 대체할만한 적당한 돌멩이가 코앞에 보였는데 오소마츠는 그것엔 시선을 주지 않고 저쪽으로 굴러간 돌멩이를 쳐다봤다. 망설임 없이 그 돌멩이를 향해 다가간 그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멩이를 툭 찼다. 제자리로 돌아간 돌멩이를 보고 만족스럽게 웃은 오소마츠는 자신도 그 자리로 가 돌멩이를 다시 차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편의점 앞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그는 앞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담뱃갑을 꺼내 살피니 텅 비어있었다. 어제 아침에 샀었는데, 벌써 한 갑을 다 피웠다. 예전엔 한 갑을 사면 일주일은 갔었는데. 급격히 늘어난 흡연량을 새삼 깨달은 그는 목덜미를 긁으며 빈 담뱃갑을 와작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주머니가 간당간당하지만 그래도 이걸 피우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 오소마츠는 담배를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가려 했다.

투명한 유리문 앞에 서니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막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는 어서오세요, 라는 점원의 목소리를 듣다 자리에서 멈칫했다. 그리고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이 차던 작은 돌멩이를 주워들었다. 귀한 것도 아니고, 그저 흔해빠진 돌멩이였지만 오소마츠는 그것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계산대 앞에 서서 담배 이름을 대는 데, 문득 전화가 울렸다. 징, 징 주머니를 울리는 진동에 꺼내보니 낯익은 이름과 번호가 화면에 떠있었다. 오소마츠는 통화를 눌러 전화를 받았다.

“오소마츠입니다~.”

삑, 하고 바코드를 찍는 소리와 함께 금액을 알려오는 점원의 목소리도 들렸다.

“응, 응. 지금 가던 길~. 담배가 똑 떨어져서.”

어깨와 머리 사이에 전화기를 끼고 오소마츠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지폐를 한 장 꺼내들고 계산대에 내밀었다.

“바로 근처니까 금방 도착함! 아아. 심부름? 뭔데?”

담배와 잔돈을 챙겨 주머니에 대충 넣으며 그는 또 오세요, 하고 인사하는 점원을 뒤로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편의점을 나와 전화를 바로 든 오소마츠는 주머니 안에서 돌멩이를 꺼내 다시 발치에 내려놓았다.

“-에, 그런 게 필요해?”

그리고 다시 그것을 톡, 톡 찼다.

“알겠어. 하타, 아니 미스터 플래그한테 한 번 가보지, 뭐.”

톡, 톡

“ -응. 알고 있다구, 데카판! 구하는 대로 갈게!”

전화를 끊은 그는 방향을 틀어 다른 곳을 향해 돌멩이를 차기 시작했다. 가급적 심부름을 빨리 마치고 오라는 박사의 당부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의 속도를 유지하며 돌멩이와 함께 하타보의 빌딩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 아르바이트라는 쥬시마츠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카라마츠를 따라다닌 탓에 이제 제법 안면을 익힌 극단 사람들이 내일 옮길 것이 많다며 한숨 쉬는 걸 운 좋게 듣고 하시다에게 도와줄까? 라고 먼저 말을 하긴 했지만, 제대로 아르바이트 비를 받고 일하기로 했으니 거짓이 아니었다.

소도구나 배경 등 필요한 소품을 만들기 위해 사온 목재나 원단, 페인트 등이 작은 트럭에 가득 실려 있었다. 그것을 안으로 옮기는 데 도움을 주며 쥬시마츠는 열심히 움직였다. 그는 움직이는 틈틈이 무대에 앉아 소도구를 만들고 있는 카라마츠를 살폈다. 카라마츠는 아직 다리가 불편해 무대에는 오르지 못하지만, 뛰어난 손재주를 살려 본격적으로 소도구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있었다. 일전의 연극에서 적자를 본 탓에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 매는 시점이었기에 바느질부터 대패질, 무대 배경에 사용할 입간판 제작 등 카라마츠는 극단의 누구보다 바쁘게 자신의 할 일을 찾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진중한 표정으로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카라마츠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덩어리였던 것이 형태가 또렷해지고 있었다. 물건을 옮겨올 때마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그림에 쥬시마츠가 넋을 놓고 있으니 곁에 다가온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뭐보고 있어, 쥬시마츠?”

“아.”

돌아보니 극단 사람이었다. 제법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 역시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연극부는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인맥으로 이곳에 들어오게 됐다고 처음 본 날 쥬시마츠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덧붙이며 교내 유명인이었던 오소마츠들을 기억하고 있다며 잘 부탁한다고도 말했다. 붙임성이 좋은 남자, 이토는 쥬시마츠의 시선이 닿는 곳에 카라마츠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곤 픽 웃었다.

“정말, 너 카라마츠 좋아하는 구나?”

“응?”

그는 들고 있던 자재를 한쪽에 쌓으며 쥬시마츠에게 말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도 그랬었지. 너희들 엄청 유명했어. 똘똘 뭉쳐서, 누구 하나한테라도 일이 생기면 바로 우르르 달려가고 그랬잖아. 아, 맞아. 나도 너희들한테 도움 받은 기억 있어. 기억하려나? 나랑 여자애가 불량배한테 걸려서 곤경에 처했었거든. 그런데 카라마츠가 발견하곤 같은 교복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든 거야. 우리 둘이 몸으로 막으면서 급히 여자애부터 우선 도망치게 했었는데, 걔가 너희들한테 가서 이야기 하니까 다섯이 바로 달려왔던 거, 나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들고 왔던 물건이 제법 무거웠었는지 이토는 허리를 쭉 펴고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외동이어서 그런가, 평소에도 너희들 조금 부러워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그 일 이후론 완전히 카라마츠가 부러워졌잖아. 다섯 명이 무슨 전대물에 나오는 히어로 같이 등장해서는 ‘누가 우리 차남 괴롭히냐!’고 맞춘 것처럼 외치는데, 지금 생각해도 멋졌다고? 대단하구나, 싶기도 하고.”

그랬었다. 그런 일도 있었다. 제각각 개성을 찾아 자신을 만들던 그 때에도, 형제이기에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소중해서, 남에게 당하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서로 심하게 다툰 와중에도 무엇보다 소중해서 형제가 타인에 의해 상처 받았다면 배로 돌려주곤 했었다. 그리고 그땐 분명히 카라마츠도, 자신들도 서로-.

“다른 친구들 보면 형제들하고 그 정도로 친한 건, 보기 어렵던데. 역시 쌍둥이라 그런 걸까. 하여튼 지금도 사이좋아 보여서 부러워! 이 나이에 그러기도 힘들잖아?”

그런데 그 소중한 걸 잊고 있었다.

이토가 아무것도 모르고 환하게 웃으며 가슴을 찌르는 말에 쥬시마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니야.”

사랑 받을 자격, 우리에겐 없어. 포근하고 다정했던 날은 이제 끝.

“아, 맞아. 오래전이라 조금 가물거렸었는데 이제 생각났다. 형제들을 진짜 좋아했던 녀석이 있었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거든? 누구였나, 명확히 기억이 안 났는데, 너였구나, 쥬시마츠! 맞지?”

“…내가 아니야….”

“응?”

사춘기를 겪으며 뿔뿔이 흩어지려던 형제들을 변함없이 사랑해주고 품어준 건 다정한 차남이었다. 윽박지르고, 밀어내고, 다쳐도, 늘 웃으면서 안아준 것은 그였다. 이기적인 자신이 아니라.

“? 쥬시마츠? 뭐라고 했어?”

이토가 물어오는 말에 쥬시마츠는 입을 꾹 다물고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몸을 돌렸다. 짧은 심호흡을 한 후, 일그러진 표정을 바로 펴며 쥬시마츠는 환하게 웃었다.

“…으응. 아무 것도!”

“그래?”

뭔가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라고 이토가 중얼거렸지만 쥬시마츠는 못 들은 척하며 쾌활하게 말했다.

“나, 더 가져올게.”

“어~.”

쉬엄쉬엄하라는 이토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쥬시마츠는 힘차게 밖을 향해 걸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눈에 힘을 주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었다.



“아, 고생했어. 카라마츠.”

카라마츠의 어깨를 두드리며 하시다가 말했다.

“그리고 쥬시마츠도.”

“일하게 해줘서 고마워!”

오늘분의 아르바이트 비가 담긴 봉투를 흔들며 쥬시마츠가 활짝 웃었다.

“고맙긴. 우리가 더 고맙지. 오늘 사람들이 다들 일이 생기는 통에 인력이 부족해서 걱정했거든. 덕분에 살았어! 무거운 거 잔뜩 옮기느라 정말 고생했어.”

“그럼 하시다. 난 이만 가보겠다.”

품 안에서 선글라스를 찾아 쓰며 카라마츠가 말했다. 딱히 멋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쩐지 요즘 태양빛에 눈이 시려서 안구 보호용으로 쓰고 있었다.

“아, 잠깐. 카라마츠.”

하시다가 뒤도는 카라마츠를 급히 붙잡았다.

“응?”

“너, 다리 상태는 어때?”

“음?”

“아직 오래 걷는 건 무리일까?”

하시다가 카라마츠의 다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카라마츠는 요즘 다리 상태에 대해 알려줬다.

“천천히 걷거나 서있는 건 문제가 없다. 달리는 건 좀 어렵지만.”

대답을 들은 하시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그럼, 너 배역 하나 해볼래?”

의외의 말에 카라마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까 단장님께서 물어보라고 했어. 무대 감각도 깨울 겸, 다리 상태만 괜찮다면 대사 두 줄 뿐인 단역이지만 이번에 올라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정말인가!”

“거짓말일 건 뭐야!”

자신의 말에 그렇게나 놀랐는지 말도 잘 못하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보고 하시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바로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런데 큰 역할은 아니야. 수군거리는 마을사람 E. 대사는 딱 두 줄.”

하시다의 말에 카라마츠의 눈은 더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 알고 있다. ‘저 여자인가?’, ‘그럴 줄 알았어.’ 라는 대사지?”

하시다는 정확한 대사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사만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호흡, 발성, 표정 등 모든 것이 완벽했다.

“뭐야, 카라마츠. 대본 다 외운 거야?”

“매일 무대를 보다보니.”

“여전하구나. 하여튼, 그 역할 맞아.”

이렇게나 작은 역할에도 기뻐하며 눈을 반짝이는 녀석이 그 동안 어떻게 살았나, 싶었다. 카라마츠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얼굴에 하시다 역시 덩달아 마음이 들떴다. 그는 밝은 어조로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 역할을 하려던 노구치 씨가 단역 3개를 해야 해서 조금 버겁던 참이거든. 네가 오케이 한다면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대사는 조금 더 늘어날 것도 같아.”

“어떤 방향으로 추가될지는 몰라도 대본은 지금 완벽한 것 같다. 억지로 늘리는 대사는 흐름만 끊을 뿐이니까. 난 그 정도면 족하다!”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은 카라마츠의 의욕 넘치는 천진한 얼굴에 하시다는 기분 좋게 어깨를 두드려줬다.

“크크. 완전히 물 만난 물고기구만! 알았어, 알았어. 오케이라고 전달할 게.”

“아. 단장님께 감사드린다고 전해줘. 내일 내가 또 말씀드리겠지만.”

“그래, 그래. 몸 관리 잘 해둬. 대사는 적지만 무대에 몇 번은 올라가야하니까.”

“알고 있다.”

머뭇거리던 카라마츠는 망설이다 덧붙이듯 말했다.

“…고맙다, 하시다.”

진심이 가득담긴 인사에 하시다는 문득 쑥스러워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난 그냥 전달한 것뿐인데 뭘. 아, 전화 울린다. 나도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얼른 마무리하고 퇴근해야겠어.”

전화를 꺼내 살피며 인사 하는 하시다에게 카라마츠도 인사를 건넸다.

“어, 내일 보지.”

“응.”

카라마츠에게 손을 흔들며 하시다가 쥬시마츠를 돌아봤다. 조용히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쥬시마츠는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하고 그를 쳐다봤다.

“쥬시마츠. 내일 올 거지?”

“응?”

계속 울리는 전화를 받은 하시다가 스피커 부분을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쥬시마츠에게 말했다.

“내일도 일거리가 많다고. 단장님께서 꼭 와달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내일 시간 되면”

“! 응! 꼭 올게!”

하시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쥬시마츠는 손을 휘저으며 힘차게 말했다.

“좋아, 그럼 둘 다 그럼 내일 봐!”

둘에게 인사를 마친 하시다는 급한 걸음으로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서 대략 5분 정도 카라마츠와 쥬시마츠는 가만히 서있었다. 카라마츠는 한껏 들뜬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었고, 쥬시마츠는 생각에 잠긴 카라마츠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저 정도로 기분이 좋은 형의 얼굴에 쥬시마츠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행복했다.

잠시 후, 카라마츠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그가 향한 곳은 집과는 반대방향에 있는 멀리 떨어진 공원이었다. 산 중턱에 있는 공원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10여분 걷는 정도로 도착할 수 있겠지만, 카라마츠는 그 배로 시간이 걸렸다. 재활을 했어도 예전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 운동량에 오르다 쉬고를 몇 번 반복해야 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 해가 저무는 것이 보였다. 공원에 도달한 시점에서 이미 땀범벅이었지만 카라마츠는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쥬시마츠는 멀찌감치 서서 그 뒤를 쫓았다. 따라오지 말라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따라와도 괜찮다는 허락도 없었기에 그냥 말없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카라마츠가 쉬면 쥬시마츠도 쉬고, 카라마츠가 걸으면 쥬시마츠도 걸었다. 느린 이동이 답답할 법도 하지만 쥬시마츠는 마냥 웃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그 정도로 환하게 웃던 형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몰랐다.

형은 정말 연극을 좋아하는 구나.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쥬시마츠는 열심히 공원을 걷고 있는 카라마츠를 쳐다봤다. 평소보다 힘이 들어간 얼굴은 정말 보기 좋았다.

얼마 전까지 형이 떠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언제까지고 곁에 남아 상냥하게 웃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곁에 있지 않아도 좋으니 형이 항상 저렇게 웃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형이 곁에 없으면, 이렇게 자신이 보러 가면 되는 걸. 형이 싫어할 테니 몰래. 보고 싶을 때 바로 볼 수 없다는 건 슬프지만, 응. 괜찮아. 형이 웃으면, 난 괜찮아.

노을이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