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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츠 사변

[오소마츠상] 카라마츠 사변10

멀리서 까르르,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멍하니 자리에 서있던 카라마츠는 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를 정도로 새까맣던 시야가 터널을 통과한 듯 순식간에 밝아졌다. 눈을 찌르는 태양빛에 카라마츠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 그늘을 만들었다. 손 바깥으로 쨍하니 파란 하늘이 보이고, 어디선가 매미가 시끄럽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카라마츠는 우두커니 서서 하늘만 쳐다봤다. 그 때였다.

“뭐해, 카라마츠.”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내려 보니 아이 하나가 앞에 서있었다. 얼굴에 떡하니 ‘나는 개구쟁이입니다.’라고 써 붙인 듯, 숨겨지지 않는 장난기를 듬뿍 머금은 웃음을 지으며 서있는 얼굴이 퍽 낯익었다. 그럴 수밖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매일같이 보고 산 얼굴이다. 비록 오래 전, 어린 시절의 얼굴이지만 그가 절대 못 알아볼 리 없는 그 얼굴.

카라마츠는 무표정한 얼굴로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슬쩍 어린 오소마츠가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생각대로 낯익은 얼굴이 또 하나 그곳에 서있었다.

“오소마츠.”

어린 날의 자신이었다. 어린 카라마츠를 향해 어린 오소마츠가 손을 내민다.

“가자구! 다들 기다리잖아!”

“…응!”

카라마츠를 향해 스스럼없이 내밀어진 손은 퍽 자연스러웠고, 그 손을 맞잡는 카라마츠의 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연스러웠다.

둘은 달려갔다. 낯익은 골목 끝에 서있는 다른 형제들을 향해. 둘이었던 작은 덩어리는, 나머지 형제들 사이에 물처럼 섞였고 한 덩어리가 된 여섯은 골목을 벗어나 어디론가 달려간다. 골목을 떠도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카라마츠는 여섯의 잔상을 곱씹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어 매미 소리만이 뜨거운 햇살과 어우러져 신경질적으로 골목을 가득 채울 무렵, 카라마츠는 아이들이 달려 나간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까와 비슷하게 다시 배경이 변했다.

카라마츠가 고개를 드니 푸르렀던 하늘은 사라지고 낯선 천장이 보인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몹시 낮은 천장은 요즘은 보기 드물게도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판자 틈새로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는 하늘이 보였다.

보기 싫은 색이다.

카라마츠는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천장에서 시선을 돌려 자신의 발치를 내려 봤다.

또 아이가 보였다.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거기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좀 전에 봤던 아이들이 입고 있던 옷으로 카라마츠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옷이다. 어릴 때, 엄마가 시장에서 도매로 싸게 사와 매일 같이 입고 다녔던 옷이다.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면 카라마츠를 포함한 형제들은 거의 이 옷이나, 이 옷과 비슷한 디자인의 옷만 입고 있었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옷이다.

이번엔 또 누군가, 싶어 아이를 살피던 카라마츠의 눈에 낯익은 자수가 보였다. 어린 카라마츠가 쵸로마츠의 꾐에 넘어가 불장난을 하다 불똥이 튀어 산지 얼마 안 되는 새 옷에 난 구멍을 가리기 위해 엄마가 파란 새 모양으로 놔줬던 자수였다.

카라마츠는 작게 한숨 쉬었다. 역시 이 아이는 카라마츠, 자신이었다.

카라마츠는 아이에게서 눈을 돌려 안을 휘 둘러봤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낡은 매트리스들, 바람 빠진 공과 거미줄 잔뜩 쳐진 언젠가의 운동회에서 사용했던 응원도구들 등이 빼곡히 들어찬 작은 창고는 오래 전, 소학교 뒤편에 있던 낡고 오래된 목조 건물이었다. 건물이라 칭하기도 민망한 그것은 당시 한참 철거 이야기가 오갔었고, 실제로 4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등교하니 터만 남고 사라졌었다. 사라지기 전까지 이곳은 아이들의 아지트, 혹은 숨을 장소로 종종 활용되었었다.

성인인 카라마츠 한명이 들어선 것으로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창고는 협소했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의 카라마츠는 이 좁아터진 공간도 ‘크다’고 생각했었다.

카라마츠는 아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드니 금이 잔뜩 가있는 작은 유리 창문이 보였다. 좀 전보다 짙어진 주홍빛에 카라마츠는 미간을 찌푸렸다. 카라마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와.”

대답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기다리는 녀석들은 오지 않아.”

그래도 카라마츠는 이야기 했다.

숨바꼭질은 여섯 쌍둥이의 단골 놀이였다. 주로 술래로 걸리는 사람은 가위, 바위, 보에 약한 카라마츠와 이치마츠 둘이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 날의 술래는 이치마츠였다. 정오에 시작된 술래잡기는 붉은 노을 끝자락에 별이 하나, 둘 빛나기 시작하는 여름의 초저녁, 홀로 식탁에 없는 아들을 찾기 위해 맨발로 달려 나온 어머니에 의해 끝이 나게 될 예정이다.

옆에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보 같이. 찾으러 오지 않으면 그냥 나가면 될 텐데, 미련한 카라마츠는 그랬다. 혹시라도 형제들이 자신을 찾는 중이라면, 이대로 나가면 놀이는 실패가 된다. 그러면 흥이 깨진 형제들이 실망할 거라는 생각에 붙잡혀 그저 규칙대로 자신의 역인 ‘숨은 아이’에 충실하려 하지만….

카라마츠는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에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의 손은 아이의 몸을 통과해 바닥으로 떨어진다. 물속에 잠긴 듯, 낡은 판자를 통과한 손 주위로 잔잔한 파문이 이는 것을 보며 카라마츠는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손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앉는 건 되면서 만지는 건 안 된다니 정말로 이상한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카라마츠는 다시 창밖을 봤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슬슬 지금쯤이려나.

생각하기 무섭게 창고의 문이 덜컹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이는 고개를 번쩍 들어 입구를 봤다. 물기로 짓무른 눈가가 저녁노을보다 더 붉었다.

“카라마츠!”

“…엄마?”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얼굴에는 작은 혼란이 맴돌았다. 왜 엄마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럼에도 아이는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리며 무릎을 꿇는 엄마를 향해 순순히 다가가 안겼다. 숨을 몰아쉬는 엄마의 품에서 이유도 모르고 작은 꾸중을 들었지만, 어린 카라마츠는 엄마의 걱정이 느껴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두 번 다시 이러면 안 돼. 알았지?”

“…….”

뭘 하지 말라는 것인지 알 수는 없어 카라마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엄마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서 카라마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엄마는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품에서 카라마츠를 내려놓고 말했다.

“그럼 돌아가자. 카라마츠.”

“응….”

카라마츠는 떨떠름한 얼굴로 엄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창고의 문은 닫히고, 금이 간 창문 너머 노을 속으로 걸어가는 둘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보던 카라마츠는 문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아까 아이의 몸을 통과하던 손이 무색하게 차가운 손잡이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손에 힘을 줘 문을 열었다.

녹색의 낯익은 바닥이 보였다. 집이었다.

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머리가 지끈 울려 카라마츠는 잡고 있던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도로 창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어느 새, 자신이 잡고 있던 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문에 연결되어있던 창고 역시 사라져있었다. 들어선 기억이 없는데도 원치 않게 방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 카라마츠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닫혀있는 방문 앞에 엉거주춤 서있는 어린 카라마츠와 그 앞에 서서 연신 손을 비비며 사과하는 다른 형제들이었다.

“미안, 카라마츠!”

“깜박 잊었어!”

“에?”

카라마츠는 형제들이 하는 말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치마츠가 오소마츠를 발견해서 잡는다고 달리다가 넘어져서.”

토도마츠의 부연설명에 카라마츠가 눈을 둥글게 뜨고 이치마츠를 봤다. 그 말대로 이치마츠는 드러난 무릎이며 팔뚝에 잔뜩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피도 나고, 아깐 코피까지 나서 집에 와서 치료하고, 어쩌다보니 정신이 없었어. 미안, 카라마츠.”

어두운 표정으로 사과하는 이치마츠에게 카라마츠가 손사래 쳤다.

“어, 응. 이렇게 다쳤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난 괜찮아. 이치마츠는 괜찮아?”

“난 괜찮아. 정말 미안….”

이치마츠의 진심어린 사과에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궁금증을 물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이 찾으러 오지 않고, 엄마가….”

학교가 집에서 한참 떨어진 거리도 아니고, 왜 엄마가 그렇게 놀라서 찾으러 온 건지 어린 카라마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어서 형제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카라마츠는 방구석을 돌아봤다. 채 지워지지 않은 흔적들이 보였다. 소파 아래로 삐져나온 과자 봉지들, 다물어지지 않은 서랍에 걸쳐진 옷가지, 구석에 엉망으로 쌓여있는 장난감들. 거기에 덧붙여 선명하게 떠오르는 집 가득 퍼져있던 맛있는 밥 냄새.

카라마츠의 시선을 받은 토도마츠가 볼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답지 않게 말을 흐리며 시선을 피하는 토도마츠를 나이를 먹고 보니 지금은 명확하게 알 것 같았다.

카라마츠가 자리에 없다는 것은 밥을 먹다 알았을 것이다. 그것도 엄마가 물어봐서.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도 큰일인데, 어딘가에 두고 자신들만 돌아와 지금까지 놀고 있었다는 것을 엄마가 알았다면 혼나는 것은 카라마츠가 아니라 형제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다. 자리에 없는 한 명에게 모든 책임을 넘겨버린 이유는.

이것은 카라마츠의 억측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분명히 이야기 했다.

-저기, 오소마츠, 그래도 카라마츠한테 제대로 말하고 사과해야하지 않아?

-에, 왜?

-왜라니. 카라마츠, 엄마한테 혼났다고? 벌로 지금 며칠 째 엄마 심부름 혼자 하고 있고.

-…그것도 우리가 거짓말해서.

-토도마츠, 이치마츠. 그거 벌써 끝난 이야기 아냐?

-끝나다니….

-심부름 정도야 평소에도 하던 거잖아? 그게 벌이야?

-그럼 너희 둘이 엄마한테 가서 말하면 되겠네. 사실 우리가 카라마츠를 까먹었어요. 그래서 카라마츠가 그 시간까지 혼자 학교에 있던 거예요. 잘못했습니다~. 하고. 어때?

-우리는 엄마한테 말하자는 게 아니라, 카라마츠한테라도-

-이치마츠, 이치마츠. 그 날, 카라마츠의 간식까지 사이좋게 다 나눠먹었으면서 그렇게 하면 곤란하구?

-그래, 맞아. 이제 와서 착한 척하는 거 비겁하지 않아?

-응, 응. 비겁해.

-그리고 다섯이나 혼나는 것보다 그냥 한 명 혼나고 마는 것이 쉽다고 너희들 모두 동의했잖아.

-난 동의한 적 없어!

-그런 적 없어.

-그럼 그 때 왜 말 안했어?

-그건.

잠시의 침묵이 있은 후,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볍게 말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 어쨌든 사과는 했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카라마츠도 괜찮다고 했다고?

어느 새 변해버린 배경-검은 복도. 어린 카라마츠는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 벽에 기대서서 형제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렸기에 어린 생각으로 저질러진 잘못을, 역시나 어렸기에 바로 잡지 못하고 ‘그래, 다섯이 혼나는 것보다는 나 혼자 혼나는 것이 나아.’라고 자신을 속여 버렸다. 하지만 이성은 속일 수 있어도 가슴이 아픈 것은 속일 수 없어 어두운 복도 바닥에 점점이 얼룩이 번져갔다. 아이가 눈물을 그치고 웃으며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본 후, 카라마츠는 어두운 복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낯선 회랑이 카라마츠의 앞에 길게 펼쳐졌다. 한 명이 겨우 걸어갈 폭의 좁은 복도에 듬성듬성 초라한 액자들이 걸려있다. 그 복도를 걸으며 카라마츠는 벽에 걸린 액자들을 감상했다.

액자 No.1

자기 위해 누운 카라마츠의 양 옆으로 이치마츠와 토도마츠가 말없이 누웠다. 그리고 한참 후, 방에는 누구 것인지 모를 고른 숨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카라마츠는 천장을 보며 낮의 일을 곱씹고 있었다. 그 때였다.

-미안해, 카라마츠.

-미안….

잠든 줄 알았던 두 사람이 사과했다.

두 사람은 그가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모를 거라 생각하고 말했겠지만, 카라마츠는 형제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형제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형제들을 사랑하니까. 하지만 그는 알고 있음을 굳이 내보이진 않고 사과를 받았음에 만족해 그저 웃으며 말해줬다.

-난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웃었던 카라마츠의 얼굴이 액자에 박제되어 있었다.

카라마츠는 두어 걸음 걸어 다른 액자를 봤다.

액자 No.2

언젠가의 소풍날, 쥬시마츠가 감기에 걸렸다. 쥬시마츠의 짝인 이치마츠가 다른 짝을 찾지 못해 혼자 울적해 하고 있음을 카라마츠는 알아차렸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옆으로 토도마츠를 보내고, 자신은 행렬의 뒤로 빠져버렸다. 뒤로 걸어가는 카라마츠에게 옆 반의 오소마츠가 입을 벙긋거리며 물었다.

-너는 괜찮아, 카라마츠?

토도마츠가 옆에 서자 이치마츠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걸로 된 거다. 그래서 카라마츠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오소마츠.

그렇게 말하며 웃었던 카라마츠의 얼굴이 액자에 박제되어 있었다.

카라마츠는 다른 액자 앞으로 걸어갔다.

액자 No.3

-미안하구나, 얘들아. 하필이면 케이크가 다 떨어지고, 조각 케이크도 딱 다섯 조각 남아서 부족한 건 이걸로….

예쁜 케이스 박스에 포장된 각각의 케이크들과 다르게 네모나니 밋밋한 카스텔라가 보였다. 평소라면 그것은 상당히 맛있는 간식으로 서로 먹기 위해 쟁탈전이 벌어졌을 테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생일. 중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에게 있어 생일은 며칠 전부터 손꼽으며 기다리는 날이기도 했다. 그것은 카라마츠도 마찬가지였다.

곱게 포장된 다른 케이크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카스텔라여서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 얹어놓은 100엔짜리 설탕 장식들은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그 궁색한 모양새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누구도 선뜻 나서는 이 없이 시간은 지루하게 흘렀다. 끝나지 않는 눈치 게임에 카라마츠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아빠와 난처한 표정으로 아빠의 옆구리를 찌르는 엄마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식탁 위에 올라가 있는 그것을 한 번 보고, 생일이 같은 형제들의 얼굴을 한 번 본다. 그리고 웃으며 그 초라한 카스텔라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카라마츠?

모두가 눈을 둥글게 뜨고 저를 본다. 카라마츠는 웃으며 말했다.

-나 카스텔라 좋아하니까 이거면 괜찮아.

-정말로 괜찮니, 카라마츠?

-응. 괜찮아.

걱정스럽게 저를 보는 엄마에게 카라마츠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주저하는 분위기에 카라마츠는 크게 말했다.

-난 정말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웃었던 카라마츠의 얼굴이 액자에 박제되어 있었다.

No.4 형제들에게 양보하며 괜찮다고 말하는 카라마츠, No.12 형제들을 대신해 청소하며 괜찮다고 말하는 카라마츠, No.33 좋아하던 사람의 러브레터를 형제에게 전해주고 다른 형제가 괜찮냐고 묻는 말에 괜찮다고 말하던 카라마츠, No.56 정말로 아끼던 물건을 형제의 부주의로 잃어버렸을 때도 괜찮다고 말하던 카라마츠, No.83 다른 형제로 오해 받아 싸움에 휩쓸려 다치고 자신에게 사과하던 형제에게 괜찮다고 말하던 카라마츠, No.100 싸우는 형제들을 말리다 가장 크게 다쳐 입원했어도 괜찮다고 말하던 카라마츠, No.200 자신도 아프지만 다른 형제도 아프기에 괜찮다고 말하며 부모님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카라마츠, No.500 동생의 눈 먼 주먹에 맞아 코피를 흘리지만 습관적으로 괜찮다는 말부터 꺼내는 카라마츠, No.999 형제의 부주의로 다쳐도 괜찮다고 말해야하는 카라마츠, No.???? 형제의 -카라마츠, 괜찮지? 라고 물어보는 말에 -괜찮다.고 밖에 말 못하는 카라마츠.

하나의 액자에 한 명의 카라마츠가 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괜찮은 적이 한 번도 없던 카라마츠들이 이 복도에 가득했다.

카라마츠는 복도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걸으면서도 끝이 있는 걸까 싶던 복도의 끝은 새하얀 벽이 막고 있었다.

막다른 길. 비어있는 액자 앞에 아이 하나가 등을 보이고 바닥에 앉아있다.

카라마츠는 천천히 아이를 향해 걸어갔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건지 아이는 묵묵히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등 뒤에선 카라마츠는 허리를 살짝 굽히고 고개를 빼 아이가 뭘 하는지 어깨너머로 봤다.

아이 주변에는 색색의 색연필과 구겨진 도화지들이 엉망으로 널려있다. 심란한 환경에도 아이의 손은 흔들림 없이 제 앞에 놓인 깨끗한 도화지 위를 아주 천천히, 공들여 가로지르고 있었다. 무심한 듯, 정성스럽게 그어진 선을 중심으로 도화지에 먹색이 번져나간다. 번져가는 먹빛을 타고 어떤 형상이 도화지에 설핏 비치다 맥없이 도화지 밖으로 흘러 드라이아이스처럼 허공에 흩어진다. 선이 그어졌던 도화지는 순백으로 돌아가 다시 하얗게 빛났다. 그것을 보던 아이는 강퍅한 예술가처럼 들고 있던 색연필을 툭 놓고, 거칠게 도화지를 구겨 벽으로 던졌다. 벽에 맞고 튕겨 나온 도화지는 카라마츠의 발치에 힘없이 떨어졌다. 허리 굽혀 그것을 줍는 카라마츠에게 아이가 말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그렇군.”

“도화지가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흠.”

“그렇다면 색연필이 문제일까?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었는걸.”

“나도 모르겠군.”

“도대체 왜 그럴까?”

“글쎄.”

그는 구겨진 도화지를 잡아 펴며 대답했다. 무성의한 카라마츠의 대답에 바닥을 보고 있던 아이가 몸을 빙글 돌려 그를 본다. 계란 껍데기 같은 밋밋한 가면을 뒤집어쓴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전부 막혀있는 살굿빛 가면은 마치 아이의 원래 얼굴인 것 마냥 꼭 맞게 씌워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걸 뒤집어쓰고 잘도 말한다 싶었으나 그걸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아이의 옆에 털썩 앉은 카라마츠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은 몽당연필을 주워들었다.

“뭐 그리려고?”

아이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구겨진 도화지를 보며 묻는다. 도화지 위로 무심히 선을 그으며 카라마츠가 대꾸했다.

“뭐든.”

“그게 뭐야.”

이해가 안 되는 듯, 아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려서 어디에 두려고?”

카라마츠는 턱 끝으로 빈 액자를 가리켰다. “저기.”라고 말하는 짧은 대꾸에 아이가 “에?”하고 놀란 목소리를 낸다.

“저 액자에는 ‘카라마츠’만 넣을 수 있어.”

“내가 카라마츠니까 상관없다.”

카라마츠의 손놀림이 빨라지고, 아이는 침묵했다. 점점 선으로 채워지는 카라마츠의 도화지를 보던 아이가 카라마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그 위로 손을 뻗었다. 막 도화지에 아이의 손끝이 닿으려던 차, 카라마츠는 왼손을 들어 그 손을 붙잡았다.

“만지지 마.”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도화지를 향해 뻗은 아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아이의 완력을 못이길 정도로 카라마츠는 약하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한 치의 미동 없이 아이의 무게를 견디며 도화지에 선을 그었다.

“그러지 마.”

아이가 애처롭게 애원한다.

“왜?”

“응?”

“왜 그러면 안 되는데?”

“그건….”

말문이 막힌 듯, 아이는 카라마츠의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손에 붙잡힌 아이의 손에 점차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카라마츠는 그림의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카라마츠는 모두를 사랑하잖아.”

“응.”

아이의 목소리에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한다, 정말로. 개울에 살아가는 작은 물고기까지, 모든 생명은 사랑스럽다.

“카라마츠는 가족들을 사랑하지?”

“응.”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카라마츠는 형제들을 사랑하지?”

그림이 완성되었다. 카라마츠는 손에 들고 있던 색연필을 바닥에 놓았다. “영차.”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벽으로 걸어갔다. 곧게 뻗어 보기 좋은 손가락들이 새하얀 벽에 외롭게 걸려있던 액자를 잡았다. 벽과 하나처럼 보였던 액자는 카라마츠의 손에 들려 쉽게 떨어졌다.

몇 번째인지 모를 카라마츠의 초상이 들어갈 예정이던 액자를 손끝으로 만지며 제자리로 걸어온 카라마츠는 바닥에 놓인 도화지를 집어 들었다. 아이는 카라마츠의 손에 들려 올라가는 도화지를 쫓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견고했던 살굿빛 가면이 잘게 떨리는 것을 못 본 척하며 카라마츠는 액자에 구겨진 도화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벽으로 걸어가 원래의 자리에 액자를 걸었다.

액자를 걸고 한발, 두발 뒤로 물러서 아이의 옆에 선 카라마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벽에 걸린 액자를 감상하며 아이에게 물었다.

“‘카라마츠’는 형제들을 사랑할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이는 말없이 벽에 걸린 액자만을 보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카라마츠는 아이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카라마츠’는 괜찮았나.”

아이의 얼굴을 칭칭 동여매고 있는 투명한 끈을 풀어내며 물었다. 그것은 아이에게 묻는 것이기도 했고, 자신에게 묻는 것이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괜찮았었지.”

대답 없는 아이를 대신해 스스로 답하며 카라마츠는 쓰게 웃었다. 한 겹, 두 겹. 풀어낸 끈이 바닥에 쌓일수록 가면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네 그림이 완성되는 날은 오지 않을 거다, ‘카라마츠’.”

모든 끈이 풀어졌다. 그의 앞에 아이 한 명 정도의 높이로 수북하게 쌓인 투명한 끈 위에 살구빛 가면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다. 무수히 많은 괜찮음을 그러모아 정성껏 만들어놓았던 ‘카라마츠’는 이제 없다.

“카라마츠는 더는 괜찮지 않게 돼버렸으니까.”

카라마츠는 손끝으로 톡, 비어버린 가면을 두드렸다. 그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균열은 금세 가면 전체로 퍼졌다. 금이 간 가면은 카라마츠의 가벼운 숨결 하나에 푸스스 먼지처럼 흩어졌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잔재들을 보던 카라마츠는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액자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또 뭐든 있었다. 그것은 깊은 구멍처럼 보이기도 했고, 별것 아닌 점으로 보이기도 했고, 창밖의 밤하늘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묘한 탈력감에 뒤로 벌러덩 누워 멍하니 천장을 봤다. 밀랍이 불에 녹듯 천천히 꿀렁거리며 흘러내리는 천장을 보고 있자니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밀려오는 수마에 몸도 정신도 맡기려는 그 때, 어렴풋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다. 하지만 딱히 누구의 울음소리인지 궁금하지 않았기에 카라마츠는 무거워지는 몸을 느끼며 그대로,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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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오자, 비문이 있을 거예요. 발견하시면 부디 댓글로 알려주세요~.

* 캐붕, 과거 날조 죄송합니다.(납짝)

* 오소마츠처럼 자기 맘대로 막 바늘 빼고 지혈도 안하고 돌아다니면 큰일납니다.

 

네, 일요일입니다! 목표했던 날짜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기쁩니다!(춤, 춤)

이번 주 중엔 숨바꼭질2를 올릴 예정입니다. 시간이 된다면 색마츠 줍다 다음 화도 중간에 짧게 올리고, 주말에 또 사변11을 올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는...아무래도 중도하차의 느낌이...llllOTL 기세 좋게 처음끝이 가장 먼저 끝날 것 같다고 섣부르게 글썼던 저를 혼내주고 싶습니다. 올리지말고 곱게 다른 글처럼 USB에나 저장해 놓을 것을... 

8월 휴가 때 한 번 붙잡고 써볼 생각이긴 합니다만 텀이 너무 길어진 탓에 손가락이 마음처럼 움직여주질 않네요...여차하면 썰 식으로라도 풀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뭐, 보시는 분은 없겠지만 역시 자기 다짐이지요.

 

*7월 31일 수정 - 후반에 들어갔던 '수술실 나오는 오소마츠' 장면의 위치가 10화 후반 보단 11화 초반이 더 적절하다 생각되어 11화 초로 옮겨집니다. 흐름은 같습니다.